[기획 연재] 1회, 선관위와 대법원의 선거범죄 수사 필요성에 대하여

사라진 4년 중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꿈

1987년 12월 16일 수요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공화당과 신민당 등 국회가 1980년 4월 21일 4년 중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합의로 만든지 7년 만의 일이다. 최규하 정부는 1980년 5월 16일 국회에서 이송되어온 4년 중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심의를 하였으나 다음날 있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5.18 광주 사태로 인하여 개헌 국민투표는 좌절되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연내 강력하게 추진했던 최규하, 신현확 정부의 좌절이다.  4년 중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좌절된 이유는 정당을 미처 창당하지 못한 김대중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8년 집권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8년이라는 시간은 김대중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김대중의 탐욕, 헛된 망상으로 사라진 것이다.

구로구청 부정선거 투표함 사건

1987년 12월 16일 아침 11시 20분경 선관위위원들이 구로구청 앞에서 우편투표함을 트럭에 옮겨 싣다 한 시민의 눈에 적발된다.  이후 시민들이 몰려들고 구로구청 선관위 사무실에서는 투표함 1개, 붓 뚜껑 60개, 새 인주 70개, 정당대리인 도장, 백지투표용지 1,560매를 발견한다.  시민들은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을 18일까지 이어가지만 새벽 6시경 5천명이 넘는 경찰 투입으로 1034명이 구속되고 건물 안에서 농성하던 208명이 연행되고 마무리된다.  이후 2016년 7월 21일 개봉된 이 투표함에서 노태우는 3,133표, 72.4% 득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구로구 선거결과 노태우는 28.6% 득표율로 당시 우편투표함에 적용하면 1,238표가 되어야 한다.  결국 구로구청 우편 투표함은 구로구 선관위 직원들에 의해서 노태우 표를 1895표나 더 넣은 투표함으로 교체된 것이다.  당시 김대중의 평민당은 “조작된 승리를 고발한다”라는 책자를 당원들에게 발행했는데 부정선거 수법으로 “환함”을 제시하였다.  노태우 표가 2천표 가까이 증가한 이 투표함에 대하여 부정선거,라고 결론을 내지 않았지만 이후 당시 성남시장 이재명은 투표소 개표를 주장하며 부정선거 주장을 하였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전자개표기 첫 도입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일어었다.  그러나 이 선거는 매우 특별했는데 전자개표기가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자개표기 도입은 밤새워 개표하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이었으나 도입 첫 선거 개표에서 밤샘 개표작업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전자개표기가 고장나고 투표지가 겹치고 걸리는 등의 심각한 결함을 드러내어 결국 수작업을 하기도 했다.  전자개표기 도입 이후 개표 사무인원은 줄지 않았고 최종 개표 마감 시간 또한 줄지 않았다.  전자개표기를 도입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 해 겨울에 있었던 2002년 12월 19일 대선 때문이었다.

2002년 12.19 제16대 대선 노무현 당선, 대선 무효소송의 시작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있기전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단일화를 철회했다.  그리고, 다음 날 투표가 시작되었고 오후 6시 출구조사 결과 발표와 함께 개표가 시작되고 투표가 종료된지 3시간 35분 만인 21시 35분, 노무현 당선 유력이 선언된다.  전자개표기의 목적이 드러난 것이다.  개표결과 노무현은 20대, 30대에서 압승을 하고 부재자 투표에서 64.1%로 이회창에 더블스코어로 이겨 겨우 2.33% 차이로 이기게 된다.  서울, 경기, 인천의 투표함에 손을 대고 개표시에 전자개표기로만 개표하여 그 범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대선 불복과 동시에 당선무효 소송으로 재검표를 요구하였고 2003년 1월 27일 전국 244개 개표소 가운데 80여 곳만 재검표하였고 이회창 표 88표 늘고 노무현의 표는 816표가 줄었다. 선거 절차 전반에 관한 문제를 선거무효 이유로 다투는 선거무효 소송과 다르게 당선무효 소송은 후보의 당선만을 다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당선무효 소송은 선관위가 위조 투표지를 사전에 투입할 경우 재검표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2007년 8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경선, 전 갤럽 회장 최시중의 승리

2007년 8월 19일 논란의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다. 여론조사를 20% 반영하기로 하여 여론조사 1개당 6표로 환산이 된다.  이 여론 조사는 3개 업체가 선정되어 1일 2천명씩, 총 6천명을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개표 결과 현장 투표에서 박근혜는 430표 앞선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2,880표 뒤지게 된다.  여론조사 2,880표는 6으로 나눠 환산하면 여론조사  480개에 해당한다.  이 때 박근혜 후보 진영에서 등장한 탄식이 “당심에서 이기고 민심에서 졌다”이다.   여론조사 참여 업체는 리서치앤리서치(R&R), 동서리서치, 중앙리서치이다. 3개 업체가 오후 1시부터 오후 8시까지 7시간 동안 CATI(카티, 컴퓨터 활용 전화 면접 시스템)를 통하여 일반 전화로 조사를 하였으나  6,000개에 못미치는 5,490개만 조사하게 된다.  요즘도 여론조사 유선 무선 전화면접 응답률은 2% 미만이다.  3일에 걸쳐서 5만명과 통화하면 1000명 남짓 조사 성공한다.  이명박 박근혜 경선 전화면접 조사는 응답 숫자 5,490개 응답율 2%면 실제 전화 면접은 274,500건이 넘어야 하고 1개 업체당 91,500건의 통화를 했어야 한다.  91,500건의 전화 통화는 최소 1분씩 계산하면 1,525시간, 7시간으로 나누면 217명의 전화면접원이 전화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70회선이 넘는 업체만을 추려 3개 업체를 선정했고 200회선이 넘는 업체와 여론 조사원은 동원되지 않았다.  7시간 여론조사가 모두 조작이라는 것이다.  CATI의 맹점은 컴퓨터가 자동으로 전화를 걸기 때문에 여론조사원은 어디로 전화 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여론 조사원이 같은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이 경선의 승자는 최시중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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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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